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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ETTE: 우리가 사는 세상 2023

기간

장소

작가

2023. 03. 31 - 2023.04.30

실내전시장

권순모 김동찬 김현주 박태현 이겨레 이지양 지후트리 최서은 홍세진 JACOB FREY

기간 | 2023. 03. 31 – 2024. 04. 30

장소 | 실내전시장

작가 | 권순모·김동찬·김현주·박태현·이겨레·이지양·지후트리·최서은·홍세진·JACOB FREY

PALETTE: 우리가 사는 세상 2023

소다미술관은 장애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포용력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한 전시, 《PALETTE: 우리가 사는 세상 2023》을 마련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장애 예술가와 비장애 예술가가 함께 참여한다.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말한다. 작품 속에는 눈과 귀, 손과 발을 동원하여 경험한 세계가 있다. 날마다 마주한 수많은 얼굴, 주고받은 낱말과 문장이 있다. 열 명의 예술가가 담아낸 세계는 저마다 다른 모양이지만, 예술의 언어로 말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제나 ‘나’를 넘어 ‘우리’로 향한다.

전시에서 주목하는 것은 ‘장애 예술’이 아니라, 수많은 ‘다름’이 모여 이룬 세계의 보편적 정서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래서 전시는 이다지도 다른 우리가, 서로에게 눈을 맞추고 감정을 나누고자 하는 같은 마음을 지녔다고 믿는 데서 시작한다. 그렇기에 전시는 다양한 생각과 환경이 교차하는 시대에서 경계 밖의 타자가 되었던 모두를 위한 것이다. 또한 그럼에도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곁을 내어줄 수 있는 다정한 마음을 가진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전시는 이곳에서 서로에게 온기를 나누어 줄 것을 청한다. 팔레트 위 여러 색이 모이고 섞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처럼, 우리를 갈라놓던 견고한 경계를 허물고 함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길 기대한다.

작가소개

강선아

빈 벽만 보면 그림을 그리려던 소녀가 있다. 펜을 장난감 삼아 놀던 소녀. 소녀는 커서 어른이 되었지만 아이는 그대로 남아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기억한다. 웃는 표정, 놀라는 표정, 작은 손짓과 몸짓, 작가가 창조한 그림 속 캐릭터는 저마다의 모습으로 작가의 기억을 대신한다. 그래서 강선아의 그림엔 구김이 없다. 그늘도 없고 미움도 없다. 어떤 경계도 차별도, 혐오와 편견도 없다. 재단되지 않은 시선과 홀로 간직해온 순수한 삶의 영역, 때 묻지 않은 아이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작가의 시선을 대변한다. 때로는 재치 있고 때로는 유쾌하게, 누구를 만나든, 어떤 경험을 하든, 작가의 손끝에선 모두가 포근해진다

김기정

김기정의 눈에 바람은 선을 그리며 분다. 나무는 색색으로 변해가고 파도는 겹겹이 흐른다. 잔디는 가로로 뻗어나가고 나뭇잎은 낱낱이 떨어지며 꽃들은 조그맣게 자란다. 김기정의 세계에서 시간은 촘촘하게 나뉘어있고 고양이의 걸음처럼 조용히 흐른다. 오랫동안 마주한 일상의 아주 작은 부분도, 사소한 기억도 작가는 그저 지나치는 법이 없다. 때때로 만나는 모든 것이 작품에 녹아든다. 그리고 싶은 것이 어떤 것이든, 광활한 바다든, 동물의 털 한 가닥이든, 작가는 가장 작은 붓으로 가장 큰 세상을 그린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드린다.

김현우

‘분 단위로 쪼개놓은 알람’ ‘하루를 빼곡히 기록하는 문서‘ ‘경계 없는 실험과 도전’ 이 모든 것이 김현우를 설명한다. 작가의 초반 기록물은 낙서에 가까웠다. 학창 시절 내내 도형, 음표, 수학 공식 등을 적어왔고 친구들의 이름을 빼곡히 쓰기도 했다. 점점 이름이 빠지고, 선들은 변형되고, 색이 더해지며 작품의 시작을 알렸다. 작가의 드로잉은 픽셀이라는 이미지로 재구성되었고 쌓여진 픽셀은 또 다른 작업들과 겹쳐지고 반복되며 다양한 이미지로 진화해갔다. 수백 권의 연습 노트를 남기면서 작가의 작업은 행간이 복잡한 시를 닮아갔다. 단숨에 해석되긴 어려워도 그 깊이가 점점 짙어져갔다. 작은 픽셀 조각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연결되듯, 작가가 그려낸 경계없는 세상 속엔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작가소개

박태현

색색이 조각조각 모여 만들어 낸 장면들. 저마다 다른 옷을 입고, 제각각의 표정을 지으며 옹기종기 서 있는 인물들. 전부 박태현이 밑그림이나 스케치 없이 테이프를 여러 모양으로 뜯어내고 붙여서 만들어 낸 것이다.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건,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나무젓가락, 휴지, 색종이, 테이프다. 재료뿐 아니라 작품의 소재 역시 일상의 면면과 밀접히 연결된다. 그는 여행에서 찍은 사진, 곁에 있는 사람, 만화 등 보고 느낀 것 무엇이든 작품으로 옮겨낸다. 박태현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로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다만 작가는 대화 대신 그만의 방식으로 말을 건넨다. 어릴 적부터 로봇을 좋아했던 작가는, A4용지에 로봇을 그려 종이 인형으로 만드는 데 몰두했다. 작가에게 친구이자 장난감이 되어주던 로봇 종이는 시간이 흘러 그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는 작품이 됐다. 잘린 테이프는 그저 조각에 불과하지만, 함께 모여 캔버스 위에 올라설 때 비로소 작가가 전하는 이야기가 된다. 박태현의 그림은 각자의 색을 가진 개개인이 모여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어갈 다정한 공동체를 상상해보게 한다.

이겨레

이겨레의 그림은 ‘한계’를 말한다. 작가는 선천적 시각 장애로 타인의 얼굴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전에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상황을 하루에도 여러 차례 겪는다. 이는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쳐 관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긴장으로 이어졌다. <방문자>는 이러한 작가의 경험과 닿아있다. 당시 공동작업실 생활을 하던 작가는 작업 공간을 방문한 이들을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웠다. 이에 동료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거나, 특징적인 모습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작가는 방문객에게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길 요청하며 눈에 보이는 모습을 화폭에 옮겼다. 최근 작가는 그의 관심사를 공동체로 넓혀 나간다. <몇 명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시리즈는 지면으로 상정된 캔버스 위에 사람이 그려진 작은 캔버스를 쌓아 올린 작품이다. 연달아 걸린 두 개의 그림은 크기가 확연히 달라 지면의 한계를 더욱 극명히 보여준다. 반면 인물들은 그들이 딛고 선 세계의 끝을 알 수 없다는 듯이 걸음을 계속한다. 이렇듯 이겨레가 말하는 ‘한계’는 작가 본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한정된 세계 위를 딛고 서 있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다만 인물들은 그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내 한계’와 ‘네 한계’를 갈라놓지도 않는다. 오히려 한계 속에서도 서로를 끈질기게 바라보며 불명확하게 흔들리는 상(相)을 붙잡고, 시작과 끝이 자명한 캔버스 위를 묵묵히 걸어간다.

이지양

이지양은 인물을 접고 펼친다. <접혀진 형상>에서 붉은 천 위에 자리한 사람의 몸을 보자. 다리, 팔, 손, 어깨.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끝내 인물의 전체 모습은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각도는 형상을 오해하게 하고, 결국 우리는 한 번에 모든 각도에서 ‘전체’를 조망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작가는 하나의 주체가 특정한 기준과 관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 상황에 관심을 가진다. 이는 각도나 위치처럼 물리적 영향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새 몸과 머리에 각인된 편향된 인식의 영향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처럼 우리 사회가 ‘정상’, ‘온전함’이라 규정하는 관점에 대해 질문한다. 영상 작업인 <우리는 모두 다른 템포로 걷고 다른 리듬으로 손짓한다(The Way We Walk)>에는 여러 사람과 동물이 등장한다. 존재들은 공통된 행위를 하는데, 바로 어디론가 ‘향한다’는 것이다. 방식은 다르다. 물 위를 헤엄치기도 하고, 걷다 멈추어 서서 사진을 찍기도 한다. 휠체어를 타거나, 개와 함께 걷기도 하고, 여럿이 걷기도 한다. 화면 속 인물이 발걸음을 옮기면 그에 따른 고유한 소리가 난다. 드럼 비트, 현악기의 리듬. 어떤 소리도 같지 않기에 하나하나 귀 기울이게 된다. 각자에게 부여된 고유한 소리는 ‘걷기’라는 하나의 행동에도 수많은 방식이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하나의 주체를 앞, 뒤, 양옆으로 돌려가며 보고, 조금씩 다른 걸음걸이도 세심히 관찰한다. 어쩌면 수많은 차이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타인과 공존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이런 것이지 않을까.

지후트리

‘행복’, ‘최고’, ‘지금 여기’, ‘함께’. 일상적이고 따듯한 단어들은 작품의 제목이자, 작가가 우리에게 선물하는 단어다. 지후트리는 수어를 주제로 작업하는 수화 아티스트다. 그의 그림에서 손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수어는 손의 형태, 위치뿐 아니라 움직임과 방향, 표정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지후트리의 그림엔 손의 높낮이와 움직임이 지시되어 있다. 또한 각기 다른 색과 형태로 표현된 손은 개성 있는 저마다의 표정을 상상하게 한다. 수어가 그의 작업에 주제가 된 데에는 가족의 영향이 컸다. 그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청력을 소실한 어머니, 사고로 인해 한쪽 팔을 잃은 삼촌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그럼에도 작가는 언제나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던 어머니와 삼촌을 기억한다. 그는 ‘손’이 콤플렉스였던 자신의 경험을 한 데 엮어 ‘수어’를 매개로 작업을 시작했다. 최근에 지후트리는 대중음악과의 협업을 통해 퍼포먼스까지 영역을 확장한다. <추억성>은 가수 디핵과 테이가 부른 노래를 수어로 번역한 퍼포먼스 작업이다. 광활한 초원에 홀로 서서 온몸으로 음악을 전하는 지후트리는 장르의 구분과 경계를 넘는다. 이는 단순히 장르에서의 실험을 넘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관통하는 주요한 지점으로 작용한다. 작가는 언어가 문화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그는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을 넘어, 공존의 언어로서 수어가 보다 많은 이들에게 닿길 기대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최서은

화폭 위를 유영하는 바람과 흔들리는 꽃잎. 한올 한올의 깃털을 휘날리는 앵무새. 그 위를 올라타 여행하는 소녀. 최서은의 그림에는 이따금 얼굴을 스치는 산들바람으로 가득한 풀숲에 앉아있는 듯한 따듯함과 나른한 평화가 감돈다. 그의 작업은 나무에 대한 특별한 애정에서 비롯했다. 작가는 대학 졸업 이후 늦은 나이에 장애 진단을 받았다. 그는 당시 느꼈던 무력감을 회상한다. 이때 작가에게 위안이 되어준 것은 나무가 주는 촉감과 생명력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나무로 그의 상황을 한계에서 가능성으로 전환했다. 최서은은 평평한 나무를 깎아내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발로 밟거나 기계로 찍어내는 판화의 방식으로 그림을 완성했다. 작가조차 이 과정에선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속단할 수 없다. 그는 인간의 바람대로 행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를 존중하는 태도로 그림을 그려낸다. 그림 속에선 새와 꽃, 나비, 바람과 같이 자연의 색채로 가득하다. 이는 작가가 나무에 느꼈던 온기와 관련되어있다. 작가가 기억하는 따스한 감각은 화폭 위에서 자라나고, 평안한 위로가 되어 전해진다.

홍세진

복잡하게 널린 자재와 전선, 드르륵, 윙윙 소리를 내는 차가운 금속 부품. 풍경은 날카로운 물체로 긁혀 부분부분 지워지고, 이내 화면을 종횡하는 선으로 가로막힌다. 홍세진의 그림은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하지만 겹치고 분할된 물체의 조합은 낯선 감각을 느끼게 한다. 작가는 이따금 카메라를 들고 을지로를 누비며 시야에 포착된 세상을 뷰파인더에 담는다. 카메라 기기에 저장된 사진들은 곧이어 캔버스로 옮겨진다. 홍세진이 주목하는 것은 작가에겐 익숙한 차갑고 딱딱한 기계 부품, 철심이 잘리고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한 공사장과 같은 이미지다. 작가는 어릴 적부터 줄곧 작은 기계 장치와 함께 살았다. 의료사고로 청력을 잃은 뒤 보청기와 인공와우를 통해 전달된 전기 신호로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보청기는 몇 해 주기로 바꾸어야 하는데, 그새 기술의 발전으로 이전 기계로는 들을 수 없었던 소리가 새로 생겨나거나, 어떤 소리는 사라지기도 했다. 작가는 이렇듯 따듯한 귀에 맞닿은 차가운 기계 장치에서, 여러 갈래의 채널로 구분된 소리가 얽히고 섞이는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했다. 그래서 홍세진은 총체적인 ‘하나’로 인지되곤 했던 세계를 여러 켜의 이미지로 나누어 배치하고 쌓으며, 보다 예민한 감각으로 익숙한 풍경을 뜯어보도록 한다. 홍세진의 그림은 자신의 감각에 충실히 가닿고자 하는 탐구인 동시에, 다양한 높낮이, 리듬, 속도로 세계를 채운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음악이 된다.